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9대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 내용 == [[1978년]] [[5월 18일]] 대의원 선거 결과 2,581명의 제2대 [[통일주체국민회의]] 대의원들이 선출되었으며, 7월 6일 대통령 선거를 위한 대의원 회의가 소집되었다. 7월 1일부터 5일까지 닷새 동안 후보 등록을 받은 결과 7월 5일 [[곽상훈]] 등 507명의 대의원의 추천을 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단독으로 등록했다. 제1야당 [[신민당(1967년)|신민당]]의 [[김영삼]], [[이민우(1915)|이민우]] 등은 후보를 내야 한다며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 개최를 주장했다. 그러나 [[이철승]] 대표 등 당권파는 어차피 입후보 요건인 대의원 200명의 추천을 받기가 불가능할 것이며, 기적적으로 후보 등록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필패인데 괜히 간접 선거를 인정하는 꼴만 된다고 반대했다. 결국 신민당은 두 번 연속으로 대선을 원천 보이콧했다. 결국 [[장충체육관]]에서 재적의원 2,581명 중 2,578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거를 시행했으며, [[박정희]] 2,577표, 무효 1표가 나와 99.9%의 득표율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. 당시 대의원 중 한 명이었던 [[박승국]] 전 국회의원은 훗날 그 무효 1표는 자신이 기표한 것이라고 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23&oid=358&aid=0000001886|회고하였다.]] 물론 그 회고가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. 그렇게 박정희는 1978년 12월 27일 제9대 대통령이 되었으나,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[[10.26 사건]]이 일어나 유신 체제는 종말을 맞고 만다. [[최규하]] [[국무총리]]가 [[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]]을 거쳐 보궐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, 이론상 박정희의 잔임기간인 1984년 12월 26일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 개헌 계획과 [[12.12 군사반란]], [[5.17 내란]] 등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. 바로 상술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, 본문인 1978년 제9대 대통령 선거부터 4년간 연속으로 매년 한 차례씩[* 1978년 박정희, 1979년 최규하, 1980년 전두환, 1981년 전두환.]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다. 당시의 정국 불안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목이라 할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